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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벌새> 리뷰, 이것을 성장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영화 리뷰 2019. 9. 24. 00:40
(약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좁다. 영화를 보는 내내 생각했다. 아이들이 빼곡하게 앉아 있는 교실, 은희와 언니가 함께 쓰는 방, 가구와 화분들로 가득 찬 집안, 다섯 가족이 함께 모인 식탁. 비좁은 공간이 주는 압력이 심상치 않다. 은희는 사방에서 들이치는 압력을 이겨 내고자 애쓴다. 남자 친구와 키스를 하고, 노래방에 가거나 디스코장에 가 춤을 춘다. 그런 은희에게는 '날라리'라는 말이 따라붙는다.' "노래방 가면 날라리다, 남자친구 사귀어도 날라리다." 날라리라는 말에 담긴 성적 억압과 검열, 혐오의 무게가 무겁다. "나는 노래방 대신 서울대 간다!" 엉겁결에 구호를 따라 외치는 은희의 표정이 어둡다. 극 중에서 은희는 거의 웃지 않는다.
<벌새>는 은희가 현관문 앞에서 문을 열어달라고 발악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것은 다른 집 현관문이다.
영화 속에서 은희의 몸부림은 애초에 잘못된 문고리를 끊임없이 잡아당기는 일과 같다. 혹을 떼어내는 일처럼 오롯이 혼자 견뎌야 하지만 막상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유 없이 답답해도 이 세상에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려 해도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다. 은희는 거실에서 노래를 크게 틀어 놓고 발을 구르고 허공에 주먹질을 한다.
"우리 가족은 다 따로 살아야 돼."
<벌새>는 은희를 중심으로 한 '세계' 전체를 조망하는 이야기이지만 그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은희네 가족 이야기다. 아빠는 권위로 집안에서 군림하고, 오빠는 짐짓 아빠 흉내를 내며 폭력을 휘두르고, 엄마는 나를 감싸주기는 커녕 종종 거기에 동조한다. 미친 듯이 원망스러웠다가도 엄마가 해주는 감자전에, 아버지와 오빠의 눈물 앞에 마음이 조금 뭉클해지기도 한다. 은희네 가족은 그야말로 수혜자 없는 희생의 공동체다. 한국형 가족주의의 병폐를 폭로하는 작품은 많았지만 언제나 남성 인물이 휘두르는 폭력의 당위를 설명하는데 급급해왔다. <벌새>는 늘 가장자리로 밀려 나 있던 '은희'라는 존재를 서사의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끌고 들어온다.
<벌새>가 불친절하다는 평이 많다. 우리는 여성 청소년의 눈으로 세상을 본 적이 없다. 그렇기에 '이해하기'에 앞서 온전히 '봐야'만 하는 순간들이 있다. 소파 밑에서 발견된 유리조각, 철거민들이 건 붉은 글씨의 현수막들. 흰 스케치북과 그것을 쓸어보는 자신의 손과 퇴원하고 돌아온 날 텅 빈 집 안의 풍경과 홀로 바람에 나부끼는 커튼. 무너진 성수대교. 은희는 이 세계의 상처와 불안한 징후를 누구보다 예민하게 감지한다.
<벌새> 속 짧고 서정적인 장면들이 처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 평화가 폐허 위에 세워진 것이라는 인식과 죄책감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벌새> 속의 평화는 결국 버젓이 존재하는 것들을 '밀어'버리거나 '없는 셈 치고' 나서야 가능해진 것들이다.
부모님이 서로 죽일 듯 싸운 다음 날, 함께 앉아 텔레비전을 보는 주말 아침 거실의 풍경은 얼마나 무섭고 서늘한가.
<벌새>는 크게 고조되지 않고 시종일관 담담한 톤을 유지하지만 사실 그 내용은 폭로에 가깝다. 영화의 카피는 '1994년, 아주 보편적인 은희로 부터' 다. <벌새>는 독립 영화로서는 이례적인 흥행을 이어가고 있으며 영화의 열렬한 지지자는 단연 여성 관객들이다. 은희의 이야기가 지금의 2,30대 여성 관객들에게 '보편'으로 이해된다는 것은 아픈 일이다. 많은 여성들이 폭력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성장기를 보낸다. <벌새>에서 지숙은 은희에게 너무도 담담하고 태연한 얼굴로 가정 폭력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은희는 지숙의 상처를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본다. 한문 학원의 옥상에서 두 소녀가 도달한 결론은 내가 죽으면 오빠와 부모님이 죄책감을 느끼겠지? 다.
"미안해, 그 아저씨가 우리 때릴까봐 무서웠어."
지숙의 대사는 앞으로 지숙이 안고 가야할 심리적 외상을 암시한다. 우리는 정말 그날 이후로 부터 자란 것일까. 오빠가 때릴 때 넌 어떻게 하냐는 영지 선생님의 질문에 은희는 "그냥 끝날 때까지 기다려요." 라 대답한다. 모든 게 지나갈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는 것을 정말 성장이라고 불러도 될까.
<벌새> 속 '영지 선생님' 의 캐릭터성이 비현실적이라는 이야기가 많다. 확실히 현실감 있는 인물들 사이에서 영지라는 존재는 어쩐지 고고하고 표표하게 떠도는 유령처럼 느껴진다.
우선 '영지'라는 인물에 앞서 '엄마'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엄마는 영화 초반부 등장하는 유일한 여성 어른이다. 영화 속에서 은희의 아빠는 언제나 엄마에게 당신도 ~해, 하는 명령조로 이야기한다. (이는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을 확률이 매우 높다.) 은희에게 엄마는 아빠와 동등한 어른이 아니다. 은희의 눈에 엄마는 언제나 가여운 모습으로 비친다. 늘 지친 얼굴과 끝이 늘어지는 힘 없는 말투. 구멍난 양말과 어깨에 붙인 파스들. 이 참혹한 세계에서 나를 조금도 지켜주지 않는 엄마지만 감히 미워할 수조차 없다. 멍하니 걸어가는 엄마를 은희가 애타게 부르는 장면은 오프닝과 더불어 <벌새>에서 가장 긴장감 있는 장면 중 하나다. 처음에는 반가움이었지만 엄마를 부르는 은희의 표정은 점점 일그러진다. 대답하지 않는 엄마. 두 모녀는 같은 공간에 있지만 엄마는 은희를 볼 수 없다. 그 사실이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언젠가 제 삶도 빛날 수 있을까요?"
'영지 선생님'을 은희가 만들어 낸 '상상 친구'로 이야기하면 그 캐릭터성이 조금 설명될 수 있지 않을까. 영지 선생님과 은희가 함께하는 장면들은 영화의 다른 장면들과는 결이 다르다. 영지는 은희가 닮고 싶은 유일한 '여성 어른'이다. "뭘 좋아해요?" 하는 질문 하나에 은희와 함께 가슴이 뭉클했다. 영지 선생님은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지며 실질적인 해결을 돕지는 않는다. 몽롱한 목소리와 힘 있는 눈빛으로 바로 은희가 그 순간에 듣고 싶었던 조언들을 건넨다. 이는 마치 아이가 인형을 끌어안고 인형의 입으로 듣고 싶은 말을 스스로에게 건네는 놀이 같다. 영지가 사라진 뒤 은희와 영지가 함께한 장면들은 마치 은희의 백일몽처럼 느껴진다.
<벌새>의 138분이라는 러닝타임은 상당히 길다. 조금 덜어내거나 압축되면 좋을 것 같다는 아쉬움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한번 이 이야기를 시작하면 이렇게 꾹꾹 눌러 담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 역시 든다.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거나 거의 없으니까. <벌새>만 보더라도 은희에게 너의 이야기를 들어주겠다고 한 어른들은 거의 없지 않은가.
<벌새>는 김보라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한국 사회에서 가정사를 이야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 저기서 '가족 같은'이라는 구호를 외치는 가족주의 사회지만 신기하게도 진짜 '가정'의 문제만큼은 철저하게 '개인'의 문제로 간주된다. <벌새>라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큰 용기가 필요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벌새>는 추억이나 성장이라는 멜랑콜리로 포장되어버린 시절의 민낯을 섬세하게 풀어본다. 한 인터뷰에서 김보라 감독은 "나의 고통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순간 부터 앞으로 나갈 수 있었다" 고 말한 바 있다. 여성 관객이 <벌새>를 관람하는 것은 나의 고통을 인지하고, 그것이 특별한 것이 아님을 인지하는 경험이다. 그리고 감독의 말처럼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 쓰고 보니 이것이야 말로 성장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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