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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아 <애니> 리뷰 : 결국하지 못하는 말책 리뷰 2019. 10. 4. 23:59
(스포일러 있음)
책 정리를 하다가 <애니>를 발견했다. 이번에 정말 책을 획기적으로 줄였는데, 정리할지 말지 오래 고민하다가 어떻게 이 책을 정리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읽기 시작했다. 우선 이 책은 참 예쁘다. 어느정도냐면, 책장에 꽂아 놓기만 해도 마음이 뿌듯해진다. <애니>라는 제목과 감정적인 파스텔 톤의 표지. 이 책은 정말 누군가 신경 써서 만들었다는 티가 난다. 정한아 작가의 소설집을 대부분 다 읽었지만 <애니>는 이전의 소설들과는 느낌이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구체적으로 말하긴 어렵지만, 더 차갑고 눅눅해진 느낌이다. 이전 소설집에서는 어떤 명랑한 비애가 느껴졌다면, <애니>에서는 그 목소리가 좀 더 성숙해진 것 같다. 내가 정한아 작가의 소설, <달의 바다>를 처음 읽은 것은 초등학교 고학년 때였고, 나머지 소설집들을 읽은 것은 성인이 된 이후였다. 나 뿐 아니라, <달의 바다>와 <애니>의 인물들 사이에서도 어떤 성장이 이루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의 바다>는 어떤 성장담이었다면, <애니>는 성장이 멈춘 이후의, 회복에 가까운 이야기다. 그러나 어른의 회복은 아이들의 회복과는 달라서 아주 더디거나 심지어는 아주 불가능하기도 하다. (이때의 어른과 아이라는 말은 단순히 나이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빈방' 속 화자도 나이는 아이지만, 사실 내면은 이미 성장을 마친 어른에 가깝다.) 아주 오래전 부터 알던 작가여서인지 나는 정한아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추억에 잠기게 되고, 가장 나중에 본 <애니>라는 소설집이 가장 좋다. 소설집 <애니>에서 가장 좋아하는 소설은 빈방, 오픈 하우스, 예언의 땅 순서다.
<애니> 속 소설의 화자는, 모든 정보를 쉽게 다 주지 않는다. 소설은 매끄럽게 진행되는 것 같지만 큰 축이 하나 빠진 듯 공허하게 느껴진다. 후반부에 가서야 빠져 버린 큰 축이 무엇이었는지 드러나고, 비로소 앞선 공백들이 매끄럽게 이해된다. 이런 이야기 방식은 마치 고통스러운 과거를 억지로 지운 채 말하는 사람 같다. 외면하려고 하지만, 그것 없이는 모든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 (트라우마처럼) 동시에 이 소설들은 지독하게 현실적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동화같기도 하다.
동생의 끈적끈적한 얼굴이 내 얼굴에 부딪혀 왔다.
그애가 우리 가족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어쨌든 그 무지를 힘 입어 동생은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었다.
소설 <빈방>의 화자는 부모의 이혼이라는 혼란을 겪고 있는 소년이다. 대학 조교수였던 아버지는 제자와의 불륜 스캔들로 몰락해 버린다. 아버지는 어머니 명의로 집을 남기고 떠나준다. 그런 아버지 보다 더 불행한 것은 '나'의 어머니다. '나'는 '남은' 어머니의 우울을 바라본다. 여기서 어쩐지 <로마>의 소피아가 떠오른다. 남편이 떠나고 자신의 삶을 재건하고자 끊임 없이 발버둥 치지만,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어간다. 그리고 그 불안의 진동은 감춰지지 않고 아이들에게 전이된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동생의 베이비 시터와 천제 만원경으로 별을 보는 장면은 분명히 동화적인 구석이 있다. 동생의 베이비 시터와 '나'는 어떤 유대 관계도 쌓을 수 없는 먼 사이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베이비 시터가 현재로서 내가 가장 안정감을 얻을 수 있는 '어른'이기도 한 것이다. 베이비시터인 노인에게도 마찬가지다. 고립된 그녀의 외로움을 조금이나마 달래줄 수 있는 존재는 '나' 뿐이다. (아기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아니므로) 이것은 지독한 현실 위에서 나올 수 있는, 동화적 관계다. '나'는 말한다. "있잖아요, 우리가 보는 별들은 전부 과거의 별빛들이래요." , "그러니까 저것들은 어쩌면 죽은 별들의 흔적일 뿐일 수도 있다는 거죠." 우리가 보는 별빛이 어차피 오랜 과거의 것이라면, 그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삶의 모든 아름다움은 결국 과거에 있다는 것. 어린 '나'는 이미 은연 중에 그것을 예감해버린 것 같다. 그리고 눈 먼 여자는 그 빛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그리고 그 장면은 꽤 아름답게 느껴진다. 하지만 아주머니의 비밀이 밝혀지고 난 뒤 그 순간 마저 먼 과거의 빛으로 물러나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 <예언의 땅>은 <빈방>보다 조금 더 차가운 소설이다. 이 소설은 지은과 영준이라는 부부의 관계의 균열을 따라간다. 균열은 아주 사소하고 느린 것이지만, 동시에 아주 조금씩이라도 붕괴를 향해 나아간다. 지은과 아이가 함께 인형 에밀리를 묻는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참 따뜻하고 아름답다. 언 땅에 따듯한 물을 붓고 삽으로 조금씩 파내어 만든 작은 구덩이. 이 소설 역시 후반부에 빠져 있던 조각 하나를 찾고 완전해진다. 고장난 인형과 죽은 아이, 로 이어지는 상징을 원래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그러나 이 소설 속 상징은 표피적이지 않고 잘 녹아 든다.
프로이트는 환자가 무엇을 이야기 하느냐, 보다 무엇을 이야기 하지 '않는'지에 더 집중했다고 한다. 나는 그 말이 너무 흥미로웠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침묵과 공백일 것이다. 정한아 작가의 <애니>를 보며 다시 그 말이 떠올랐다. 이 소설 속에서 중요한 것은 말해지지 않는 것이다. 인물들은 마치 모든 상처를 극복한 듯 담담해보이지만, 그 침묵 속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다. 누구도 결국 자신을 가장 아프게한 이야기만은 선뜻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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